내고장 역사교실 제2부 ⑭ 초기 백제의 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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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백제의 산성
●문화재명: 파주 월롱산성지(경기도 기념물 196호)와 용상사
용주서원에서 나와 좌측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월롱산을 올라가 보자. 월롱산은 해발 고도 약 220m로 야트막하다. 암벽과 돌들이 많긴 하지만 험하지는 않아서 초등학생도 쉽게 오를 수 있다. 월롱산 능선을 따라 정상으로 가는 길은 풍경도 꽤 괜찮아서 트래킹 코스로 추천할 만하다. 정상에 오르면 사방을 조망할 수 있다.
월롱산은 두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용주서원이 있는 봉우리를 파주 월롱산, 임진강 쪽의 봉우리를 교하 월롱산(기간봉)이라고 한다. 파주 월롱산에 오르면 북동쪽으로 LG 디스플레이와 파주평야가 한눈에 들어오고, 남쪽으로 고양시 일대와 서울의 북한산 및 관악산까지 보인다. 교하 월롱산에서는 서쪽으로 교하 일대의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여 서해로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고 하는데, 군부대가 들어서 있다.
월롱산성이 초기 백제의 성으로 평가되다
월롱산 주변에는 높은 산이 없고 비교적 낮은 구릉과 평야 지대가 펼쳐져 있다. 월롱산을 장악하면 임진강을 도하하여 남진하는 세력과 한강을 건너 내륙으로 진출하는 세력을 동시에 통제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군사적으로 천연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2004년 경기도박물관에서 학술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파주 월롱산과 교하 월롱산 모두에서 산성의 흔적을 확인하였다.
파주 월롱산의 산성은 정상부와 9부 능선상에 축조되었는데, 성의 전체 형태는 남북이 길쭉한 타원형이다. 성벽은 자연지형을 이용했기 때문에 거의 수직의 절벽을 이루고 있고, 곳에 따라 흙과 돌이 혼합되어 이루어지기도 했다. 성 안은 고도의 차이가 거의 없는 평탄지로 이루어져 있다. 박물관의 학술 조사팀은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을 이용해 축조한 백제의 산성으로 평가하였다. 많은 양의 백제 토기편이 채집되었다.
백제 온조가 한강 서북에 성을 쌓다
실제로 백제의 온조는 도읍을 옮기고 영역을 확정하면서 한강 하류에 성을 쌓는다.
“짐이 한수(한강) 이남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오랫동안 편안할 것이다. 마한에 사신을 보내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려라. 그리고 한강의 서북에 성을 쌓고 백성을 옮겨 살게 하여라.”
“예, 대왕마마”
이 당시에 쌓은 성이 월롱산성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온조왕 때 이미 백제의 북쪽 경계가 패하(예성강 추정)에 이르고 있으므로, 월롱산은 백제 초기의 군사 거점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월롱산서쪽으로 약 6㎞ 지점에 오두산이 있고, 동쪽으로 약 5.5㎞ 지점에 봉서산이 있는데, 모두 삼국 시대부터 산성이 설치된 곳이다. 따라서 월롱산성은 임진강과 한강 하구 지역을 통제하던 초기 백제의 주성으로 평가된다.
고려 현종이 용상사를 짓게 하다
파주 월롱산은 고려 시대에도 방어 기능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시대 거란(요나라)은 세 차례에 걸쳐 성종 12년(993), 현종 1년(1010), 현종 9년(1018)에 고려를 침략해 왔다. 거란은 3차 침입 때 소배압을 앞세워 10만의 병력으로 개경으로 진격하였다. 거란군이 개경 부근까지 다다르자, 고려 현종은 도성을 버리고 민복 차림으로 이곳 월롱산까지 피신하였다.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거란군을 귀주에서 대파하자 전란이 평정되었다.
“여봐라, 월롱산에 절을 지어 부처님께 감사의 마음을 올려라.”
도성으로 돌아간 현종은 자신이 피신했던 월롱산을 기념하기 위해 절을 짓고 용상사(龍床寺)라 불렀다고 한다. 실제로 현종이 월롱산에 머물렀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동국여지승람』에 고려 임금이 머물러서 용상사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내용만 전한다.
문화 유적 관리가 아쉽다
월롱산성지는 등산 코스 또는 관광지로 활용될 수 있으나, 아쉽게도 현재는 성벽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군사용 도로가 성 안을 가로지르고 있고, 성벽으로 추정되는 곳에 군인들이 파 놓은 참호가 들어서 있으며 체육공원이 들어서 있다. 더구나 남쪽 성벽이 있던 곳은 한 동안 채석이 이루어져 완전히 파괴되었다. 일반인들은 채석으로 깎인 절벽이 성벽인 양 오해를 하기도 한다. 또한, 용상사 대웅전이 재작년에 소실되었다. 문화 유적 관리가 아쉽기만 하다.
정헌호(역사교육 전문가)
#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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